도서관 서가 정리 봉사에서 만난 《100인생 그림책》
지난 1편(1365 신청 가이드)에서 이야기했듯, 1365 자원봉사포털에서 승인 완료 문자를 받은 뒤 약속된 일요일 오후 시간에 맞춰 동네 공공도서관을 찾았다.
초여름의 더위가 남아 있는 주말 오후였지만, 도서관 안은 시원한 공기와 조용한 책 냄새로 가득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어린이자료실 데스크에 다가가 “오늘 1365 서가 정리 봉사 신청하고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1. 첫 임무: 다 읽은 책 바구니와 청구기호 맞추기
봉사활동이 처음이라고 말씀드리자, 담당 사서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웃으시며 오늘의 업무를 안내해 주셨다.
도서관 이용자들이 다 읽은 책을 서가 아무 데나 꽂아두면 다른 사람이 책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테이블 곳곳에 놓인 다 읽은 책 바구니에 책을 모아두도록 되어 있다. 오늘의 내 임무는 이 바구니에 쌓인 책들을 제자리에 정확히 돌려놓는 일이었다.
[ 도서관 서가 정배열 기본 규칙 ]
1. 청구기호 라벨 확인
- 책등 아래에 붙은 한국십진분류표(KDC) 라벨의 숫자와 저자 기호를 본다.
- 예: (아동) 813.7 → 아동 서가에서 앞자리 숫자 순서대로 서가 번호 찾기
2. 서가 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정렬
- 같은 분류 숫자 안에서는 저자 이름 가나다순으로 꽂기
3. 북엔드로 책 줄 맞추기
- 책이 쓰러지지 않도록 가볍게 밀착시켜 반듯하게 세우기
사서 선생님께서 시범을 보여주실 때는 간단해 보였지만, 막상 수천 권의 책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 앞에 서니 눈앞이 아득했다. 800번대 문학 코너부터 천천히 라벨의 숫자를 대조하며 책을 한 권씩 꽂기 시작했다.

2. 아이들의 엄청난 독서 속도, 그리고 ‘웃픈’ 순간
내가 배치된 곳은 1층의 작은 다독다독 도서관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부모님 손을 잡고 온 어린 친구들이 꽤 많았다.
작업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아주 흥미롭고도 ‘웃픈(웃기고 슬픈)’ 상황이 벌어졌다.
아이들의 책 읽는 속도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빨랐다. 그림책이나 동화책, 학습만화는 몇 분 만에 한 권씩 뚝딱 읽어 치웠고, 아이들이 책을 다 읽고 바구니에 올려놓을 때마다 나의 정리 일감은 실시간으로 늘어났다.
내가 책 3권을 제자리에 꽂고 돌아옴
└── 그사이에 바구니에 새로 쌓인 책: 5권 😅
바구니를 비워두기 무섭게 새로운 책탑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화면 대신, 푹신한 매트에 엎드려 반짝이는 눈으로 종이책에 푹 빠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대견스러웠다. ‘나는 저 나이 때 밖에서 뛰어놀기 바빴는데, 주말에 도서관에 와서 이렇게 책을 열심히 읽다니’ 하는 생각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아이들 틈 사이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한 분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동화책을 넘겨보고 계셨는데, 그 모습 또한 묘한 울림을 주었다.
문제는 내가 책의 제자리 찾기가 서툴러 할머니 주변 서가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서성였더니, 할머니께서 넌지시 한마디를 툭 던지셨다.
“어휴, 정신없어.”
순간 화들짝 놀라며 온몸이 ’쭈글’해진 채 속으로 연신 죄송해하며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초보 봉사자의 서툰 열정이 빚어낸 뻘쭘한 순간이었다.
3. 서가 정리 중 만난 뜻밖의 선물: 《100인생 그림책》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저마다의 속도로 책장을 넘기던 그 공간에서, 바구니에 쌓인 그림책들을 하나씩 분류하던 중 유독 두껍고 차분한 색감의 그림책 한 권이 손에 잡혔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하이케 팔러가 글을 쓰고 발레리오 비달리가 그림을 그린 《100인생 그림책》이라는 작품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화려한 공룡이나 마법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서, “이건 어린이들보다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데?” 하는 호기심에 잠시 서가 구석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겨보았다.

0세부터 100세까지, 우리가 인생에서 배우는 것들
이 책은 갓 태어난 0세부터 100세까지, 인간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며 새롭게 깨닫고 배우게 되는 인생의 순간들을 한 페이지씩 담아낸 책이다.
0세: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에 온 순간
...
9세: 비밀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
18세: 이제는 내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
30대: 삶이 내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
80대: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법을 배운다.
위 문장들은 책의 원문 인용이 아니라, 읽으면서 기억에 남은 대목을 내 말로 정리한 것이다. 실제 책은 0세부터 100세까지 한 살 단위로 한 페이지씩 그림과 짧은 문장이 실려 있다 [1].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순수한 배움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고, 지금 내 나이대 페이지에 적힌 문장을 읽었을 때는 바쁜 일상에 치여 잊고 지냈던 스스로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스스로는 아직도 어리고 서툴다고 생각했는데 책 속에 펼쳐진 나이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벌써 이렇게 어른의 나이를 먹어왔구나’ 하는 묘한 먹먹함이 밀려왔다.
옆에서 엎드려 아무 걱정 없이 책을 읽는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계시는 분들도 모두 나와 비슷한 고민과 시간들을 지나쳐 왔겠지 싶었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나이들 앞에서 나는 또 무엇을 배우고,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조용한 서가 한구석에서 사색이 이어졌다.
이 책은 아동 코너에 꽂혀 있었지만,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책이었다. 앞만 보고 바쁘게 달리기만 하는 지금의 어른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시간을 둘러보게 해주는 선물 같은 책이었다. 도서관 봉사를 오지 않았다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귀한 보물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4. 은근한 눈치 싸움과 쏜살같이 지나간 2시간
책을 조심스레 원래 분류 서가에 꽂아두고 다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도서관 서가 정리의 물리적 업무 강도는 그리 높지 않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도 아니고, 쾌적하고 시원한 실내에서 조용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구니에 책이 점점 수북하게 쌓여가는데 내 정리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면, 지나가는 이용자들과 사서 선생님의 시선에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걸음걸이가 빨라졌지만, 2시간만에 마스터가 되긴 쉽지 않았다. 타이쿤 게임을 하는거 같이 묘한 쾌감도 있으나 한두번 더 하면 잘할 수 있을 거 같긴 하다.
그렇게 책을 찾고, 꽂고, 각을 맞추다 보니 어느덧 2시간의 봉사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마치며: 주말 오후가 남겨준 것들
출석부에 서명을 마치고 도서관 문을 나서는 길,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마음만큼은 한없이 상쾌했다.
1. 스마트폰 화면을 벗어나 보낸 2시간의 아날로그 몰입 (디지털 디톡스)
2. 동네 아이들과 주민들이 이용하는 공간에 작은 도움을 보탰다는 뿌듯함
3. 《100인생 그림책》이라는 따뜻한 인생의 문장을 만난 뜻밖의 행운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얻어온 만족감은 생각보다 컸다. 낯설고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주말 반나절이라는 시간 동안 도서관에 질서를 더하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
주말 반나절,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쉼을 찾고 싶은 직장인이라면 동네 도서관 서가 정리 봉사에 한 번쯤 도전해 보길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공고에는 3~4시간으로 적혀 있었지만 실제 배정된 활동 시간은 2시간이었다.
참고 문헌
- [1] 하이케 팔러 글,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 《100 인생 그림책》. 사계절, 2019. 원제 Hundert: Was du im Leben lernen wirst (2018).